길디 긴 서론
여태 TRPG라는 놀이로 스토리를 짜고, 인물을 표현해보면서 조금 느낀 것이 있다.
실패한 인물, 성공한 인물은 그럴싸한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금 전에 구입했던 스토리텔링 책을 읽으면서도 확실해졌는데, 캐릭터를 구현하면서도 고려해야할 것이 꽤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TRPG를 하는 목적은 다른 게 아닌, 다양한 이야기의 구현과 체험이다. 현실에서는 벌어지기 힘든 사건이나 세계관, 사건들을 몸소 경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이야기 구현을 위해 캐릭터를 이용해서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내가 TRPG를 하는 가장 큰 이유다. 흥미로운 세계관이나 룰의 재미, 게임적 요소의 즐거움 같은 부차적인 요소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드문 경험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게 있어서 인물은 캐릭터 개인의 서사가 내 구미를 당기지 않는 이상 어차피 스토리의 하위로 취급당한다. 유감스럽지만 이게 내가 인물을 보는 관점이다.
그런 캐릭터라도 이용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매력적이고 사랑받는 캐릭터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이것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 최근 하고 있는 생각들은 이 캐릭터성을 최대한 성공적으로 끌고 나가기 위한 요소와 조건들을 찾는 것이다. 정리해보자면, 흔히들 말하는 '캐릭터 덕질'을 위한 것이 아니고 캐릭터의 긍정적인 면, 내 의도에 최대한 맞춰 캐릭터의 성격을 짜고 연출하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가 필요한 것인지 헤집고 싶은 것이다.
대다수 TRPGER들에게 있어 캐릭터들은 나름대로 애착이 있고 시나리오에 있어서도 필수불가결한 소중한 요소이기 때문에 이 글의 관점에 대해서는 다소 불편함을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개인 블로그에 게시된 개인의견이기 때문에 이런 견해도 있다고 넘겨줬으면 한다.
캐릭터 표현의 어려움
내가 캐릭터성을 정하고 그것을 제대로 이끌어간 적은 슬프게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캐릭터가 어떤 의도로 행동했고 어떤 결말을 맞았는가를 전부 따져봤을 때 내 기준에 차는 캐릭터는 그다지 많지 않다. 객관적으로 보는 이유는, 캐릭터의 행동에 있어 어떤 이유가 있다고 나중에 붙인 경우 어차피 궤변, 의미부여를 한 후설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애매모호하고 뇌내망상과도 같은 것이 아니라, 캐릭터의 컨셉이 명확하게 그 자리에서 다른 플레이어에게ㅡ작품으로 치면 독자ㅡ캐릭터가 와닿게, 이해할 수 있게 풀어나가는 요령이 필요했다. 이런 높은 기준이기 때문에 기준을 만족시키려면 그 허들이 상당히 높고 자연히 성공적인 캐릭터는 적을 수 밖에 없었다. 이대로 무미건조하게 캐릭터를 찍어내듯이 만들어 어영부영 플레이하는 것보단, 방법론을 만들어 구축하고 그 프로세스를 거치는 편이 내가 더 만족하며 RPG를 플레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캐릭터 표현의 성공례 고찰
내 적은 성공례의 캐릭터 디자인은 전부 어떤 키워드로 시작했다. 캐릭터를 표현하는 키워드ㅡ그것이 성격이건 외양이건 어떠한 키워드로 시작해서 마인드맵식으로 전개시켜나가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좀 더 고려하고 만들어진, 즉석이 아니고 고찰을 해 한 두번정도 갈아엎은 설정이 더 정교하고 성공률이 높았다. 이것은 또 많은 것을 추측할 수 있게 하는데 첫번째로 캐릭터의 핵심이다. 캐릭터가 어떤 역할을 맡고 어떤 난관을 마주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축약해내는 무언가가 키워드가 되는 것이다. 그 키워드는 너무 난해하면 안되고 직관적이어야 한다. 예로 내 성공적인 캐릭터 중 하나는 키워드가 '열혈 소년만화 주인공'이었다. 이것에 충실하게 따라 작성하고 적당한 설정을 쥐여주는 것으로 꽤 성공적인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었다.
두번째로는 캐릭터의 계획이다. 즉석으로 우연히 캐릭터성을 붙여 만들어나가는 것도 즐겁지만 그것은 확실하지 않은 방법이다. 또 내 의도와 맞지 않는 행동을 할 가능성이 커서, 좀 더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캐릭터의 의도가 명확해야한다는 것을 느꼈다. 이 캐릭터의 의도를 떠받쳐주는 것이 캐릭터의 과거설정이고, 이 과거는 캐릭터의 현재를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TRPG는 특성상 캐릭터가 변화할 수 있는 구조가 되어있기 때문에, 내 성공례의 캐릭터는 변화를 촉진하기 위해 이 과거가 너무 지배적이지 않게 캐릭터를 구성했다. 어떤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성격이 이렇고 극복해야할 장벽은 무엇이라는 것을 과거로서 제시한 것이다. 그 결과 캐릭터를 롤플레잉하면서 헤매는 일이 줄어들게 되었다.
반대로 실패예의 고찰
반대로, 실패예는 대부분 중구난방이었다. 그 상황에서 유독 하고 싶은 게 많았다거나, 계획성 없이 캐릭터를 작성해 핵심 키워드가 유실된 탓에 캐릭터의 컨셉이 일관적으로 유지되지 않은 경우였다. 이것은 TRPG의 유동성과도 관련이 있는데, 스토리에 따라 대처를 하다보니 무리하게 틀어지거나 상황에 부적절하게 조절하여 캐릭터의 일관성을 떨어뜨리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캐릭터는 매력적이지 않았고 자기멋대로 움직이는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또, 캐릭터가 1차원적인 것도 고질적인 문제였다. 너무 단단하고 안정적인 캐릭터성도 좋지 않았다. 캐릭터를 구성하는 요소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 계속해서 진행되기 때문에 캐릭터는 예측하기 쉬워지고 난관이 적으며 그 결과 지루해졌다. 이 부분은 TRPG의 변화해가는 스토리와도 반대되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캐릭터성이 퇴화하고 수축하기 쉬웠다.
캐릭터의 능동성이 없는 것도 장르적인 특성과 아우러져 좋지 않았다. 어떤 과거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인물이 가만히 있다면 이야기는 정체되어 진행이 되지 않는다. 또, 변화를 너무 없이 가는 경우에도 그 캐릭터성에 질려버리는 경우가 생겼다. 이 부분을 간과해버린 경우 실패한 캐릭터로 남았고, 정적인 캐릭터성을 짜는 것에는 보다 더 깊은 고찰과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성공적인 캐릭터를 위한 조건?
그렇다면 성공적인 캐릭터를 구축해 잘 운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난 스토리텔링 책에서 이 힌트를 찾았다.
1. 캐릭터에게 성격의 기반이 되는 과거를 쥐여준다.
캐릭터의 성격은 과거의 산물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캐릭터의 성격도 단번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건들을 겪어가면서 서서히 만들어지는 행동양식이 바로 성격이다. 그 때문에, 캐릭터의 과거의 분위기와 사건을 몇 개 정도 설정해두는 것으로 성격을 보다 자연스럽게 끌어낼 수 있다. 다만, 남모를 과거를 지니고 있는 경우ㅡ비밀 설정이라고 자주 불리는 것ㅡ 캐릭터의 직관성이 떨어지기 쉽다.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범위 내로 설정해야 한다.
2. 정적인 캐릭터를 만들 때는 꼭 약점을 주도록 한다.
천하태평한 성격, 너무도 낙천적인 성격, 너무도 소심한 성격, 타인과 융화되지 않는 성격, 말이 없는 성격 등 정적인 캐릭터인 경우 TRPG의 기용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TRPG는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캐릭터가 어떤 지, 캐릭터의 심리 변화를 직접 보여내야하는데, TRPG의 세션에서 시나리오 외적으로 대뜸 이 캐릭터가 왜 이런지를 보여주겠다고 나서서 구구절절 묘사를 하는 것은 대부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캐릭터를 내/외부적인 요소로 움직여야 한다. 캐릭터간의 대화, 캐릭터의 동기를 주는 인물이나 사건으로 인한 것들도 전부 포함해 캐릭터가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을 설계하고 운용해 캐릭터를 표현해내야 자연스럽고 융화에도 무리가 없다.
3. 동적인 캐릭터를 만들 때는 일관적으로!
외향적이거나 점차적으로 성장해가는 성장형 캐릭터를 채용하고자 할 때는 캐릭터의 중심이 잡혀있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 캐릭터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나 컨셉을 몇 가지 선정해 과거와 성격과 설정으로 개연성을 만들어야 한다. 이후 그것에 위화감이 없다면 캐릭터는 세션에서 의도대로 잘 이끌어갈 것이다. 이것에는 많은 생각과 상담이 필요하다. 하지만 성공했을 경우에는 긍정적으로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만들어낼수도 있다. 물론, 이 캐릭터에도 장단점과 강약점이 있어야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4. 노리는 요소는 철저하게 뺀다.
캐릭터 설계에 있어서 가장 큰 미스가 있다면, 외적인 것이나 자잘한 설정에 너무 집착하는 경우이다. 캐릭터를 표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과 개연성이다. 캐릭터에 이유가 없다면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으며, 이입을 할 수 없다면 공감도 할 수 없다. 내외적으로 공감을 얻지 못하는 캐릭터는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물며 악당도 어느정도 공감할 수 있는 이유와 개연성이 있어야 주인공의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의 취향을 적절히 이용해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는 것은 좋지만 작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요소는 가급적 쳐내야 한다. 좋은 시나리오, 무대, 이야기에는 그에 맞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용도에 맞게 선별하는 것도 중요하다.
5. 표현되지 않을 것이라면 과감히 요약하거나 폐기한다.
세션에 캐릭터의 설정이 다 녹아나오지 못할 것이라면 과감하게 빼도록 한다. 캐릭터의 설정을 한가득 쌓아두는 것도 좋지만 이것은 세션에 표현이 되어 이야기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들이다. 비하인드들이나 세션 외의 설정들은 소설이나 글로 남겨두되 표현해낼 때는 모두가 납득할 수 있도록 표현하는 스킬이 필요하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과감하게 쳐내라. 생각 외로 세션 내에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으며 주인공은 당신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 않은 이상 세세히 나올 일이 없는 것들에 체력을 소모하여도 그다지 의미있는 행동은 아니다.
6. 캐릭터 간의 관계는 명료하면서 간결하게 간다.
캐릭터에게 있어 성격을 보여주는 가장 큰 요소는 성격도 있지만 캐릭터들과의 관계이다. 하지만 이 관계에 너무 복잡하게 잔가지를 만들어버리면 캐릭터가 흐려지고 핵심을 놓치기 쉽다. 따로 소설을 쓸 것이 아니라면 복잡하게 관계만을 벌여놓기보다는 캐릭터의 중심을 잡고 스토리에 초점을 둬 그 상황에 대응해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편이 성공적일 확률이 높다.
7. 캐릭터를 만들 때에는 의도를 가지고 계획적으로 간다.
의도를 가지고 계획을 짜고 캐릭터를 만들면 그 캐릭터로 어떻게 표현할 지가 보이게 된다. 기껏 만든 자신의 캐릭터가 목적도 없이 적당히 표류하며 적당히 끝내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욕심이 있다면 캐릭터를 구성하는 데에 시간을 쏟아보자.
8. 캐릭터의 표현은 직관적이어야 한다.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에 사족이 붙고 이러이러하다 일일이 설명을 해야만 한다면 그 시점에서 그 캐릭터는 그다지 좋은 캐릭터라고 볼 수 없다.
캐릭터의 과거는 성격으로 표현되게 되어있으며, 캐릭터의 컨셉과 성격을 가지고 행위를 해서 그 캐릭터가 어떤 캐릭터인지 표현되는 것이다. 필요한 설명을 제외하고 제아무리 따로 잔설정을 풀어써도 타인의 입장에서는 지루할 뿐ㅡ흥미가 있을 경우는 예외로 하고ㅡ어필에 있어서 별 의미는 없다.
반면 캐릭터가 핵심을 짚어가며 자연히 이야기를 풀어나가서 '이 캐릭터는 이렇다'라고 표현되는 것이 명료하다면 이것은 성공한 캐릭터라고 봐도 될 것이다.
9. TRPG는 스토리텔링을 하는 게임이다.
나는 TRPG를 하며 캐릭터 위주의 시점인 사람과, 이야기 위주인 시점의 사람을 여럿 만났다. 같은 TRPG지만 그 두 시점의 차이는 명확하게 존재한다. 어느 쪽이든 나는 존중하지만 TRPG의 개념을 한 번 더 짚고 넘어가줬으면 한다. TRPG는 캐릭터를 매개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스토리텔링 게임이다.
캐릭터가 어찌됐건 이야기에 협력을 해야하고, 이야기의 변화에 따라 캐릭터성을 바꾸는 등 능동적으로 대처해야만 한다. 때문에, 캐릭터만을 보고 캐릭터 간의 사사로운 것에 너무 몰입하기보다는 이야기를 전개해감에 따라 캐릭터가 주체가 되어 유도리 있게 대처를 해나가는 방식이 좋다는 것이 내 사견이다.
결로온
물론 이 화제는 결론이 내려진 사안이 아닐뿐더러 개인의 고찰과 사족에 지나지 않는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쯤은 캐릭터의 표현방식과 캐릭터의 성공적인 묘사를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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